나의 아들딸이 섹스파트너를 뒀다고 고백했을 때
why not?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왜냐하면 그 대답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나의 아들딸도 인격체이고, 인격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 자유를 갖는다. 성적 자기결정권 또한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소유이다. 성을 함부로 다뤄선 안 되는 이유는 생명이 잉태 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철저히 피임을 했다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심지어 서로간의 합의 하에 잤다는 데야. 내가 뭐라고 참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가. 내 자식과 이 문제로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잠깐 상상만 해 보더라도 뻔할 뻔자, 안 봐도 비디오다.
성병에 걸릴 수도 있잖니. 괜찮아요, 검사 했는걸. 공부에 방해되지 않겠니. 괜찮아요, 아직 상위권인걸.
몸이 힘들 수 있지 않겠니. 괜찮아요, 늦잠 잔적도 없는 걸.
그리고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핵심은 이거다. 가족 간에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다른 사람은 다 해도 내 자식은 안 돼. 뭐, 그런 느낌이 있다는 말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또 다른 예시 하나. 얼마 전에 친구와 미스터 피자를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 부부가 서로 합의하에 각자의 파트너를 따로 둔다면 어떨까. why not?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다.
“서로 동의하에 했는데 그게 뭐가 문제야.”
그러나 대답 끝에 남는 찜찜함.
“문제없긴 한데, 우리 엄마 아빠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나도 안 그러고 싶고.”
이 정체모를 ‘느낌’이 가족을 구성한다. 부모는 자식을 먹여 살리고, 자식은 자라서 부모를 부양한다. ‘느낌’인 만큼, 이유는 없다. 굳이 꼽자면, ‘가족이기 때문에’ 정도?
Why yes?
이런 ‘가족적인 느낌’이 없다면 세상은 좀 더 자유롭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욕망에 솔직하고, 억눌림 없이 후련한 생활. 굿바이 정신병, 굿바이 욕구불만.
그러나 오늘도 누군가는 결혼을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가족’이라는 규범 아래에 들어갔다. 자기 발로 걸어서. 이게 정말 웃기는 일이다. 왜 사람들은 굳이 가정을 꾸리려 하는가? 왜 굳이 가정을 꾸려서 자유연애를 하고서도 질타를 받으려 하고, ‘나’는 지워버린 채 지혜엄마, 수현이엄마로 살아가려 하는가? 왜? why yes?
더 웃긴 사실 하나는, 이렇게 말 하는 나 역시 그럴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체제 순응적인 인물이니까. 엄마 아빠가 바라는 대로 누군가―의심의 여지없이 남성인 사람과―와 결혼 할 것이고, 자식을 둘 쯤 낳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엄마가 그러듯이, ‘이런 게 사는 거지, 이런 게 행복이지’ 하고 중얼 거릴 지도 모른다.
글쎄, 그게 정말 행복인지, 아님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Yes에 대한 이유는 아마 아직 조금 더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학교과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송이의 장미꽃 (0) | 2021.02.28 |
---|---|
슬픔, 미친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0) | 2021.02.28 |
The Giver, 귀차니스트들의 유토피아 (0) | 2021.02.28 |
오롯이 내용적인 삶이란 성립하는가? (0) | 2021.02.28 |
김성중, 국경시장 (0) | 2021.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