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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The Giver, 귀차니스트들의 유토피아

과제를 받고 제일 먼저 떠올랐던 작품이 ‘The giver’였다.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 진 것으로 알고 있다. 중학생 권장 도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인 지금 봐도 여러모로 생각 할 거리가 많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 속 사회에서, 가족을 꾸리기 위해서는 사전에 신청을 해야 하며, 선별을 통해 짝지어진 사람과 파트너가 된다. 강한 감정을 유발하는 섹스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성욕을 없애는 약을 복용한다. 때문에 아이도 생기지 않고, 자녀를 갖고 싶으면 신청서를 제출하여 국가에서 선별한 여성들이 인공수정으로 낳은 아이를 입양 받게 된다. (얌전하고 건강한 아이만 선별하여 각 가정에 입양 보내고 나머지는 안락사 시킨다) 시민들은 어디서나 감시받고 그에 따라 스피커를 통해 주어지는 명령을 듣는 생활을 한다. (정작 시민들은 감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나이별로 비슷한 제복과 장난감을 부여받는다. 일정 나이가 되면 관찰결과에 따라 직업을 부여받고 그에 따라 직업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 강제로 안락사 당한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4주기였다. 그 날 ‘현대 시 읽기’시간에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 담론을 이 사회에 가지고 왔는지 배웠다. 우리는 참사를 목격하며 흘린 눈물을 통해 이 사회에 ‘공동체’를 다시 뿌리내리게 했다. 이 사회는 다시 공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위로하는 법, 응원하는 법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모양으로, 인터넷에서는 익명의 다수가 망언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매우 분노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느니, 질린다느니, 지치지도 않냐느니, 구역질난다느니…. 나는 책에 실린 추모시만 읽어도 눈물이 났는데. 아이를 잃은 부모의 감정은, 그리고 그에 대해 위로받지 못하는 심정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인데. 그들은 과연 인간일까, 아니면 공감할 줄 모르는 뱀 인걸까.

 

그런데 얼마 전에 자료정리를 하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고 3때, 논술대비를 하며 내가 쓴 글이었다.

 

비극이 일어난 시점에서 저들끼리 즐겁게 경기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정서상 거부감이 들 수 있으며, 일종의 예의에 어긋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오락을 위해 관람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응원을 해 즐기는 것은 과연 비난 받아야 하는 일인가? 다음은 최근 읽은 논술 지문이다.

<아담 스미스의 제약적 비전>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이 도덕적 한계와 자기중심적 성향을 지님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다. (중략) (그 사람들의 처지를 슬퍼하는, 또는 동정하는 제 3자의 감정은)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단지 그렇게 느끼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고, 결과적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스미스는 “우리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슬픔을 스스로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줄여 줄 수 있는 정도의 자극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 동참 할 것을 명령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야구를 관람한 이들이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경기를 조용히 관람 해 봤자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득이 되지 않으며 결국 응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재미가 반감된 야구 관람자들에게만 손해가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왜 그들은 비난받는 것인가?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터넷에 질린다느니 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 아닌가. 그럼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분노한 것인가. 나도 공감할 줄 모르는 뱀이었나.

 

또 하나,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시크릿 가든’다시보기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힘으로 껴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잠을 자려하는 (sleeping) 장면이었다. 그 신과 함께 로맨틱한 OST가 흘러나왔고, 여자 주인공은 마치 그 상황에 대해 설렘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지금 이 드라마가 나왔다면 틀림없이 큰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게 낭만적으로 느껴졌었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것은 정말 가변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분명 그땐 맞았는데, 지금은 아닌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매우 피곤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다양성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인정하면 다른 하나가 모순이 되는데 ‘그 또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닌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이해를 좀 더 쉽게 하기위해 타인과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서로의 생각에 대해 분노하고 말싸움으로 끝나버린다. 이는 다시 피로감을 불러온다. 그 뿐인가, 개인사도 가변적이다. 오늘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가 다음날엔 왠지 쌀쌀맞은 그 사람 때문에 기뻤다가 한없이 우울했다가 하고, 쇼핑을 하든 외식을 하든 너무 많은 선택지들이 있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이 많은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니, 현대인들이 힐링, 힐링을 외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누군가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게,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게 삶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삶에 진절머리가 날수도 있다. 아파테이아의 상태로, 그저 평온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은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다, 라고. 사람으로서 생각을 멈추고 계몽을 포기하는 것은 비난받아야 할 일이라고 어떤 철학자가 그랬다지만, 어쩌겠는가. 너무 피곤하고 귀찮은데. 이런 사람들에겐 진로를 탐색하는 일도, 성욕이며 사랑 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아이를 책임지는 일도, 선택의 위험에 노출되는 일도 너무 두렵고 힘들기만 하다. 그냥 감정 따위 없애버리고 누군가 정해주는 대로, 그날그날 내게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사람을 내가 게으름뱅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물론 자유며 의식을 포기하고 개나 돼지처럼 살아갈 마음은 없지만, 나 역시 요즘 들어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The Giver’의 사회가 어쩌면 더 편할 지도 모르겠다고, 아주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디스토피아란 주체적인 삶에 지친 자들의 유토피아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