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과연 너굴맨이야
[ 박민규 단편집 ‘카스테라’중,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개작하기 ]
3학년.
‘...는 이 너굴맨이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또 낚시성 게시글. 손을 흔들 듯 한쪽 발을 든 너구리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매일이 전형적인 고3의 일상이다. 10시까지 야자에다 귀가하면 11시. 아직 덜 외운 영어단어가 한 장.
1시까지 씻고 자려면 삼십 분 인터넷하기도 빠듯한데 낚시라니.
이상하게 유행하기 시작한 저놈의 너구리를 씨 말려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처리하긴 누가 처리해. 귀엽게 생겨가지고는.
취침시간까지 삼십분. 신경질적으로 영어 단어장을 책상위에 내던졌다.
다시 3학년,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리들로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안 그래도 삼수해서 남들보다 나이도 많은데. 벌써부터 9급 공무원 합격해서 돈을 번다는 친구,
유명 대기업에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는 친구.
누구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동기는 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인생을 즐기고 있단다.
나
는?
틱, 틱. 방구석에 누워 스마트폰 액정이나 문지르면서 우울해 하는 내가 있다.
여행 갈 용기도 돈도 없고, 교환학생은 가고 싶지는 않지만 (다들 가는데 안가기도 불안하고) 어째야 하나 싶다.
대기업 인턴? 내 주제에 대기업 인턴으로 채용 될 리가 있나.
공무원이라… 삼수까지 해서 대학 왔는데 너무 아깝지 않나.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럼 나는 어째야 하나.
틱, 틱. 유튜브 인기영상이 재생된다.「초 웃김! 귀여운 동물 영상!」
잘못 눌렀네. 꺼버려야지. 지가 귀엽든가말든
가?
피식, 좀 귀엽긴 하다. 침팬지가 고양이를 쓰레기 버리듯 던져버리는 영상.
어릴 때 봤던 만화영화 마냥 그 고양이는 빙글 빙글 돌며 강으로 첨벙, 떨어진다.
아, 아닌가? 고양이가 아니라 너구리인가보다.
참 한심한 모습이다.
침팬지한테 먹혀서 양분이 된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고 강에 던져지다니.
너도 나만큼 한심하구나.
3년차.
결국 꿈 없이 나이만 먹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듯한 직장을 가져야만 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졸업 후 1년을 그냥 흘려보냈다.
당연히 부모님의 눈총을 받았고, 결국 얼렁뚱땅 3년차 공시생이 되었다. 그리고
틱, 틱.
여전히 같은 자세로 새벽에 핸드폰을 하고 있다.
그것도 꾸준히 동물영상만 찾아보며 힐링 하고 있다.
아아, 치유된다, 치유 돼. 너구리 귀엽지. 고양이도 개도 귀엽고.
사실 나, 돈 많이 벌고 싶은 건 아닌데.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사실 그냥 가끔 영화도 보고 떡볶이랑 순대정도 먹으면 행복할 것 같은데.
그리고 라쿤을 키워야지! 슬플 때 쓰다듬으면서 위로도 받고 말이야.
그렇지만 그러면 부모님께 너무 미안하니까, 열심히 사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아아, 하기 싫다, 하기 싫어.
착잡한 마음에 환기나 시킬 겸, 고시원 특유의 작은 창문을 열어
젖히
는
데
밖에 뭔가 있었다.
새벽 어스름에 보이는 것은,
너구리.
심지어 ‘들’.
내 눈이 이상한건가. 꿈을 꾸고 있나.
잠시 넋을 놓고 바라만 보다 트레이닝복 바람으로 고시원을 뛰어 내려갔다.
여전히 너구리가 보였다.
그것도 가까이.
노란 헬멧에 하이라이트 조끼를 입고 바닥을 쓰는 너구리.
시멘트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너구리.
나와 같은 싸구려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편의점에서 나오는 너구리.
그야말로 너구리, 너구리 밭.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너구리들은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미안. 부담스럽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너희들은 너구리들인데.
어떤 너구리가 떨어진 도토리를 주우며 지나가기에, 나는 그 사람, 아니 그것을 붙잡고 물어봤다.
저, 너구리 아니세요?
순간 너구리와 대화하려면 너구리말로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너굴씨는 대답을 했다.
나는 너구리지.
너구린데 왜 여기계세요?
너도 너구린데 여기 있지 않니.
제가 너구리라구요?
그래, 평범한 너구리잖니.
너도 보아하니 28 스테이지에서 막혔나보구나.
28 스테이지요?
28 스테이지가 어렵긴 하지, 너구리라면 누구나 그즈음 해서 막히곤 해.
스물여덟 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28 스테이지라니까. 내가 도와줄까? 나는 치트키를 가지고 있어.
28 스테이지고 뭐고, 스물 여덟 살의 나는 도움이 절실하긴 했다. 그래서,
덕 덕
끄 끄
해버렸다.
너구리가 살짝 웃더니 말했다.
눈을 감고 쪼그려 앉으렴. 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치트키를 입력 해 줄게.
눈꺼풀 아래의 어둠. 순간 무언가가 품속에 들어왔다.
자, 이제 눈을 뜨렴.
쪼그려 앉은 내 품속에 들어온, 토실토실하고 폭신폭신한 너구리 한 마리.
마음껏 쓰다듬어도 너굴맨은 물지 않으니 안심하라구!
그야말로 내가 가장 원하던 것이었기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과연 너굴맨이야.